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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문자자료


우리 문화, 우리 음악

 

산대희, 그 화려한 축제로의 초대

손태도(문화재전문위원)

  

   오늘날은 축제의 시대라 할 만큼 지역마다 다양한 축제들이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또 국가적으로도 외국의 유명한 축제들이 이뤄 내는 관광 문화적 성과들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에도 그러한 세계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축제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전통 사회의 대표적인 축제는 산대희였다. 동해 바다에 있다는 봉래, 방장, 영주 같은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을 만들어 놓고 그 위와 아래에서 광대와 기생이 가무백희를 하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인간이 하는 일은 인간에 국한되지 않고 자연, 나아가 신에게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무제가 숭산(嵩山)에 오르니 숭산이 세 번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한서, 무제기) 이른바 ‘산호(山呼) 만세’다. 오늘날의 만세 삼창은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요임금 때는 궁중에서 음악을 연주하면 온갖 길짐승, 날짐승까지도 뜰에서 춤을 추었다 한다.(서경, 익직) 이른바 ‘백수무’(百獸舞)다. 산대희를 할 때 여러 동물들로 분장한 광대들이 춤을 추는 것은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산대희도 이와 같은 차원이다. 동해 바다에 세 마리의 큰 거북이들이 삼신산을 떠받치고 있는데, 나라가 태평하면 이 거북이들이 춤을 춘다는 것이다. 산대희는 이러한 삼신산을 떠받치고 있는 거북이들이 춤추는 것을 연출한 것이다. 그러므로 산대희를 한다는 것은 나라가 태평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그것을 과시하고, 구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산대희는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신라 진흥왕 때부터 그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라의 산대희는 다음처럼 고려 시대로 이어졌다.

  

   태조 원년 11월에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전주(前主)는 매해 중동(仲冬)에 크게 팔관회를 설하여 복을 빌었사오니 빌건데 그 제도를 따르소서.” 하니, 왕이 이를 받아들여 드디어 구정(毬庭)에 윤등 일좌를 두고 향등을 사방에 나열하였다. 또 채붕 둘을 맺었는데 각각 높이가 5장(丈)이 넘고, 가무백희를 앞에서 보였는데 그 사선악부(四仙樂府)와 용, 봉, 상(象), 마(馬), 거(車), 선(船)은 모두 신라의 고사(故事)였다. 백관이 포홀(抱笏)로 행례하니 보는 자가 도성을 기울였고, 왕이 위봉루에 출어(出御)하여 이를 보았으며, 해마다 상례로 하였다.

고려사, 지, 권23

 

   여기서의 채붕이 산대에 해당되는데 당시 산대는 5장 곧 약 16m 정도의 높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는 이러한 천령(天靈), 명산대천, 용신 등 우리 민족 고유의 신들을 섬겨 복을 비는 팔관회 외에도, 부처를 위한 연등회에서도 더욱 성대한 산대희를 했다. 고려 시대는 연례적으로 팔관회와 연등회 등 적어도 1년에 두 번 이상의 산대희를 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불교적 요소가 다소 있었던 팔관회와 연등회는 폐지되었다. 다만 고려 중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연말 나례 의식이 더욱 확대되어 해마다 섣날 그믐날이나 설날이 되면 궁궐 내에 산대를 설치하여 그 위에서 불꽃 놀이를 하여 잡귀잡신도 쫓고 새해도 맞이하며, 또한 가무백희도 즐겼다. 그리고 국내에 큰 경사가 있거나 중국 사신이 올 때 이러한 매년 있었던 연말 나례희를 더욱 확대하여 성대한 산대희 공연을 했다.

   산대희는 원래 좌우로 나눠 서로 경쟁하는 것이기에 후대로 갈수록 더욱 성대해지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조선 시대 세종 때는 다음처럼 산대의 높이를 60척 곧 20m 정도로 제한하고 있다.

  

   병조에서 계하기를, “산대의 높이는 상세한 규정이 없어서, 산대를 맺을 적마다 좌우편이 서로 높게 하려고 하므로, 바람이 심하면 혹 기울어져 쓰러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산대의 기둥이 땅에서부터 60척 이상을 더 올리지 못하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를 따랐다.

세종 실록, 8년 2월 임진

 

   이러한 대규모 산대희는 1784년 이후에는 대체로 열리지 않게 된다. 그러면 산대의 규모가 가장 대단했던 조선 중기 때는 어느 정도였을까?

  

   좌우 양쪽이 각기 춘산(春山), 하산(夏山), 추산(秋山), 설산(雪山)을 만드는데, 산마다 상죽(上竹) 3개, 차죽(次竹) 6개가 필요하고, 상죽은 길이가 각기 90척, 차죽은 각각 80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광해군 일기, 12년 9월 정축

 

   이로 보아, 조선 중기의 산대는 가장 큰 나무 기둥이 90척 곧 30m 정도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럴 경우, 나무 기둥을 땅에 묻어 고정시키는 것을 고려한다면 실제 높이는 25m 정도였을 것이다. 또한 좌우 산대는 좌우 2개의 산모양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의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 좌우 양쪽에 각기 춘․하․추․동 등 계절에 따른 4개의 산봉우리들을 각기 만드는 것이기에 그 높이도 높이려니와 그 전체적인 규모도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해 바다에 있다는 삼신산을 모방한 산대에는 그러한 삼신산에 있다는 궁궐, 사찰, 인물, 동물, 화초들을 실제처럼 만들어 장식해 두었는데, 날짐승의 경우에는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실제 살아 있는 새들을 날렸다.

  

   조학소(造鶴所)에서 쓰는 날개가 흰 거위 외에도 채붕 위에 배설할 살아있는 까마귀, 까치 각 50마리, 살아 있는 수리 부엉이, 매, 따오기, 올빼미, 비둘기, 꿩 각 20마리, 자송(刺松) 8백 조(條), 대나무잎 5짐, 숙마(熟麻)로 꼰 새끼 4천 타래를 경기 각 고을로 하여금 금월 24일 이전까지 배정하여 상납하게 하라.

연산군일기, 11년 12월 무진

 

   산대의 모양도 모양이지만 그러한 산대를 바탕으로 한 연출도 참으로 볼 만한 것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산대희에 동원된 광대들의 수는 조선 중기의 경우 600명 정도 되었다. 인조 4년의 산대희와 관계되는 좌산대도감의 문서인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 1624)에는 좌산대도감 소속의 광대들 286명의 이름들이 적혀 있는데, 당시 우산대도감까지 합하면 600명 정도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실록의 기사와도 일치한다.

  

   노래개짓하는 희자(戱子)들을 전적으로 전라도에 책임지운 것은 그 수효가 무려 6백 명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광해군 일기, 13년 9월 계묘

 

   산대희의 공연 종목들은 다음의 동월의 <조선부>(朝鮮賦, 1490)에도 나와 있듯 어룡(魚龍) 유희, 무동타기, 땅재주, 마상재(馬上才), 외줄타기, 쌍줄타기, 솟대타기 등과 같은 기예들과 요임금 때 음악을 연주하면 온갖 짐승들도 춤을 추었다는 고사에 입각한 백수무(百獸舞) 등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는 어룡 유희가 나오네.

이하의 글에서는 모두 백희를 베풀어 조신을 맞이하는 광경을 말하였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래와 영주의 바다 해를 끼고 있고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자리의 오산(鰲山)을 벌렸는데, 높이가 광화문과 같은 극히 공 교롭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무산협(巫山峽)의 물을 마시네.

사람의 두 어깨에 두 어린 아이를 세우고 춤을 춘다.

근두(땅재주)를 뒤치매 상국(相國)의 곰은 비교할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울거니 어찌 소금 수레를 끄는 기마(驥馬)가 있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리매 가볍기는 신선과 같고

솟대를 타기 위해 뛰어오르매 양산귀(梁山鬼)인가 놀라 보노라.

장식한 사자와 코끼리는 모두 말가죽을 벗겨 만든 것이고

춤추는 봉황새와 난새는 크고 작은 꿩꼬리들로 만든 것이네.

 

   이 외에도 동해 바다의 선녀가 수명장수하는 복숭아를 바치는 궁중 무악인 <헌선도>(獻仙桃), 고려 시대 이색의 <구나행>(驅儺行)에 언급된 토화(吐火, 불 토하기), 탄도(呑刀, 칼 삼키기), 조선 시대 문종 실록에 소개된 규식지희(規式之戱)인 광대(廣大, 큰가면 춤), 서인(西人), 농령(弄鈴, 구슬들 던져받기), 소학지희(笑謔之戱)인 수척(水尺)․승광대(僧廣大) 등이 나오는 본산대 탈놀이, 오늘날 남사당 놀이로 전승되는 꼭두각시 놀음, 접시 돌리기, 발탈 등도 있었을 것이다.

 

국립국악원, ‘국악누리’, 2006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