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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공연예술학회

문자자료


우리 문화, 우리 음악

 

영화 ‘왕의 남자’로 돌아보는 조선시대 화극 500년의 역사

 

손태도(문화재전문위원)

 

   근래에 ‘왕의 남자’란 영화가 크게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 속에는 임금을 주관객으로 하여 광대들이 여러 가지 연극들을 한다. 이러한 광대들의 연극들을 보며 사람들은, “왕 앞에서 실제로 광대들이 그러한 연극들을 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광대패인 장생, 공길 일행들이 우연히 궁궐에 들어가 여러 가지 연극들을 하였듯, 임금 앞에서 광대들이 그렇게 도발적인 연극들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영화 속에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기만 하더라도, 광대들이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들을 연극으로 꾸며 왕 앞에서 공연하였고, 연산군 때뿐 아니라 모든 왕들이 매년 연말이면 그러한 광대들의 연극을 보았다.

조선시대 왕들이 광대의 연극을 보는 이유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비록 광대의 말일지라도 통치에 도움을 준다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광대의 놀이가 정치에 유용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은, 멀리 사마천(B.C. 135~91)의 『사기』에서의 우맹(優孟)과 우전(優旃)과 같는 광대들에서부터 이미 시작된다. 임금 주변에는 으레 광대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 우맹과 우전은 임금을 단순히 즐겁게 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광대다운 언행으로 임금으로 하여금 바른 정치들을 하게끔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광대 놀이도 임금의 통치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전통을 성립시켰다.

   우리나라에서의 이러한 광대 놀이들의 정치적 목적은 주로 한 해의 마지막 날 이뤄지는 연말 나례희에서 화극(話劇)을 보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연말 나례희는 새해가 오기 전인 한 해의 마지막날에 잡귀잡신들을 몰아내기 위해 그들이 무서워 할 가면들을 쓰고 타악기들을 두들기며 구나를 하고, 그러한 구나의 연장선상에서 처용무도 추며, 화산대(火山臺)를 만들어 그 위에서 불꽃놀이 등도 하는 것인데, 그러한 여러 행사들 중 광대들의 화극을 보는 것도 하나의 관례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연말 나례희는 고려 전기에 이미 들어와 있었으므로 이러한 나례희 때 화극을 보는 전통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안정적으로 행해진 것은 조선시대다. 조선 왕조 실록은 이러한 연말 나례희 때의 화극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임금은 구중궁궐에 거하여 정치의 잘잘못과 풍속의 미악을 들을 수 없으니 비록 광대의 말이라도 혹 풍자하는 뜻이 있으면 채용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것이 나례를 행하는 이유다.

명종 실록, 16년 12월 29일(갑신)

 

   임금이 궐 밖의 일을 알기 위해 화극을 보고 또한 화극 공연이 나례 때 가장 중요한 일이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 기사로도 알 수 있듯, 임금을 주관객으로 하여 종친, 신하 등이 배석한 가운데 매년 연말 나례희 때면 광대들이 시정의 여러 일들을 화극으로 꾸며 공연하곤 했던 것이다.

 

   임금이 왕비와 더불어 사정전에 나아가서 나례를 구경하였다. 왕세자가 입시하고, 종친, 재상, 승지 등도 또한 입시하였다......잡희가 시작되어 밤 2고(鼓)에 역귀를 쫓은 우인(優人)들이 잡희를 통하여 스스로 서로 문답하면서 관리의 탐오하고 청렴한 모양과 항간의 비세(鄙細)한 일까지 들춰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

세조 실록, 10년 12월 28일(정미)

  

   화극은 한 명의 광대가 중심이 되어, 가면이나 인형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한 말과 행동으로 세간의 여러 일들을 재미있게 꾸며 공연하는 것인데, 오늘날 개그(gag)와 거의 같다.

   예를 들어 <진상(進上) 놀이>는 풀을 묶어 큰 것 2개, 중간 것 1개, 작은 것 1개를 만들어 두면, 자칭 수령이라고 하며 광대 한 명이 동헌에 앉아 아전을 불러 큰 것 2개는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에게 올리라 한다. 중간 것은 대사헌에게 올리라 한다. 마지막에 남은 작은 것 1개는, “이것은 임금님께 드려라.” 한다. 수령이 고관들에게는 뇌물로 큰 것들을 올리고, 임금에게는 제일 작은 것을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연극을 임금 앞에서 하여 임금을 웃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 ‘왕의 남자’의 소재가 된 광대 공길의 일도 다음처럼 연산군 11년 12월 29일에 있었던 일이므로, 역시 연말 나례희 때의 화극 공연에서 있었던 일이다.

 

   공길이란 배우가 ‘노유희’(老儒戱)를 하며 말하기를,

“전하는 요순과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皐陶)와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언제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창고에 가득한들 내 어찌 먹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왕이 그 말이 불경하다고 하여 매질하고 먼 곳으로 유배시켰다.

연산군 일기, 11년 12월 29일

 

   그러나 궁중의 연말 나례희는 조선 후기인 인조 이후에는 대체로 열리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화극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화극은 간단한 말과 행동만으로 하기에 공연 예술적으로는 아주 단순한 공연물이다. 그래서 종래 화극 공연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기반이었던 궁궐의 나례희가 폐지되자, 광대들은 화극적 방식에 매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는 재담극이라 할 수 있는 이 화극에 광대의 또 하나의 재주인 소리를 곁들여 재담 소리로 나아가거나, 이러한 재담 소리를 서사적으로 더욱 발전시키고 소리도 또한 성악적으로 보다 수준을 높이며 이른바 판소리로 나아간 것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들면 화극의 기록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종래 화극이 주요한 공연물로 공연된 과거 급제자의 잔치인 문희연과 같은 곳에서도 판소리가 광대의 가장 중요한 공연물로 공연된다. 조선 후기에는 광대의 대표적 공연물이 화극에서 판소리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근대 무렵 서양인들은 화극을 본 기록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광대들은 사람이 붐비는 거리나 모퉁이에 네 개의 기둥을 세우고 막을 친다......사또 앞에서 벌어지는 송사(訟事)의 장면, 태형(笞刑)의 모습, 내외 싸움 등 상류 사회와 하층 계급의 장면들이 번갈아 가면서 연출된다.

W. E.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1882)

 

   또 실제로 미국 주한 공사 서기관으로 1884년경에 조선에 있었던 퍼시벌 로웰은 다음과 같은 길거리에서의 화극 공연 사진을 남기고 있다.

   이러한 화극은 근대 무렵 광무대 같은 대중 공연장에서도 공연되었다.

 

▲광무대 심청가......땅재주 무당놀음 담배장사 김인호 웃음거리

《매일신보》(1914. 6. 20.)

  

   여기서의 ‘웃음거리’가 화극에 해당하며, ‘담배장사’는 다음에 보듯 그 이전부터 매우 흥행적인 화극 중의 하나였다.

 

연기자는 사실상 한 명이었다......뭐니뭐니해도 가창 훌륭한 연기는 담배 행상 흉내였다.

퍼시벌 로웰(1884년경 체류),『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이렇듯 화극은 비록 조선 후기에 들어 광대의 주된 공연물 자리를 판소리에 내주기는 했으나, 근대 무렵까지도 비록 길거리에서의 공연 등의 방식으로라도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적어도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있어 왔던 화극의 역사를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근래에 광대를 소재로 한 영화 ‘왕의 남자’가 흥행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이때에 우리나라에 있었던 화극의 전통도 보다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

 

국립국악원, ‘국악누리’, 2006년 월호